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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og SEASON 1/코리안 밀레니얼의 인생사

29.9살 에세이

 

머리말

오늘 나의 20대가 끝난다. 사실 29살 12월 31일에서 30살 1월 1일로 넘어가는 그 시점은 개인적으로는 내 삶이 생후 n일에서 n+1되는 임의의 날 중 하루이며, 글로벌 기준으로 보면 또 28.xx살이 되는 애매한 그저그런 날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시점이 되었다고 맞춰서 완성되는 것도 없고, 그 시점을 넘었다고 해서 갑자기 달라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시점이 되면 20대의 인생까지 살아 본 결과로 형성된 나의 정신을 담은 글을 하나 써놓고자 했다. 내가 그래도 주어진 수명의 무려 37% (현재 대한민국 30세 남성의 기대 수명은 81세이다)를 그럭저럭 살아낸 인간인 만큼 '그 동안 쌓아온 정신 세계를 정리해보면 가치있는 통찰이 한두 개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고, 지금의 정신을 잘 다듬어 박제해놓으면 남은 63% 인생을 살면서 가끔씩 돌아볼만 하겠다 싶기도 했다.

 

 

서론. 서른

 

막 29살이 되었을 때, 올해 12월에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둔 일 중 글을 쓰는 것 외에 한가지가 더 있었는데, 바로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진지하게 불러보는 것이었다. 노래는 언제든 부를 수 있지만 29살 12월만큼 인생의 모든 시기 중 이 노래를 가장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때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한테 들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인생 최고의 진심을 담아 이 시대의 '서른 송'을 부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진짜 서른 즈음이 되어 아무리 이 노래를 들어도 이전과 크게 다른 감명이 없다. 이 노래는 김광석이 만 서른이 되던 해인 1994년 발표된 곡인데, 아무래도 26년 전의 서른과 지금의 서른은 다른 까닭이다. 이 노래는 청춘, 젊음이 다 끝나버린 시점에 사는 재미도 없고 인생에 채워진 것도 없는 허무함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듣다보면 굉장히 남은 인생이 별로 없는 것만 같다. 

 

지금 시대 한국 사회의 서른 즈음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젊음과 모든 인생의 새로움이 끝난 허무함'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근삼십년을 살았음에도 생각만큼 완성되지 않은 삶과, 아직도 생각보다 살아감에 미숙한 스스로에 대한 당혹감과 막막함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차원에서 지금 시대의 '서른 송'으로 브로콜리 너마저의 '서른'을 추천해본다. 이 노래 속의 서른은 아직 서럽고 힘겨운 하루하루에 힘들어하는 미숙한 존재임과 동시에, 이제서야 시작이며 이게 어른이 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하는, 청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이다.

 

 

 

본론. 인생

아직 스스로 청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절반도 살지 않은 새파란 놈이 인생을 논하고자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인생이라는 개념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해보면 그래도 들어줄 만한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1. 인간의 인생

20대에 주로 읽은 책들

 

그다지 다독자가 아니라 과제, 여행용 빼고 자발적 독서로 읽은 책은 10년간 스무권 남짓이다. 많진 않지만 재밌었던 부류로 다음 책을 골라나가다 보니 지난 10여년간 읽은 책은 대략 이런 느낌들이다. 전부 비전공자수준이겠지만 대개 인류학 베이스에 지리학이나 역사학 몇스푼, 뇌과학이나 지구과학도 조금 들어있다. 어떤 심리로 이런 것들을 찾아읽었는지 되새겨보면, 결국은 인간을 관찰대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나는,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반짝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냥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동일하게 작용하는 원리에 따라 어쩌다보니 지금 이 위치에 이 시기에 이 모양으로 있게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관찰자의 관점으로 '인간이 왜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를 포함한 인간의 본질이고, 그렇게 이해한 인간의 본질 대로 살면 그게 인생을 잘 사는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인간이 왜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다; 우주속의 인간, 지구에서의 인류,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간, 인간 중에서도 한국인, 한국인 중에서 밀레니얼 등. 이렇게 인간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을 넘나들면서 각각의 논지들을 조금씩이나마 내면화하고 나면, 더 나아가 나라는 개인이 스스로의 인생을 다차원적으로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에 그 관점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인생의 여러가지 국면을 경우에 따라 내가 더 (정신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관점을 골라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주속의 인간>은 인간 차원에서 겪을 수 있는 아무리 커다란 고난이라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만들어주는 무지막지한 관점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인간은 150억년 간 에너지와 물질이 임의로 움직이는 맥락 속에서 아주 잠깐 형성된 물질 중 하나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산소,수소, 탄소 같은 물질이 진공보다 좀 더 높은 밀도로 뭉쳐 있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별 의미가 없다. 내가 설령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인간이더라도, 혹은 가장 행복한 인간이더라도 별 의미가 없다. 뭘 해도 잘못한 것이 아니고 뭘 해도 잘한 것도 아니다. 사견으로 우주적인 스케일에서 의미가 있는 삶을 살려면 블랙홀 몇개 정도 처리할 능력은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니까 인간은 그냥 어쩌다 형성된 신체가 기능하는대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분해되면 된다.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관점 중 하나다. 지금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몸과 마음이 왜 그런지에 대해 가장 실질적인 답이 있을 것만 같은 관점이다. 이렇게 생물종으로서 인간을 보는 관점을 다른 관점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이 그렇게 유전적으로 다양하지 않은 종이기 때문이다. 인간들끼리 생긴것도 다르고 생각과 성질도 굉장히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단 현생 인류라면 생물학적 관점에서 유전적으로 꽤나 동질한 종이라고 한다. 마치 무늬만 다른 시골황구랑 도시백구가 둘 사이 새끼도 잘 낳고 똑같은 밥 먹고 잘 살듯이, 언뜻 보기에 굉장히 다르게 생긴 인종끼리도 무늬만 다를 뿐인 것이다.  

 

정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동아프리카 초원지대에서 발원한 종이라고 한다. 그 시절 그 동네에서 지금의 인간이 완성되어 번성했고, 몇만년 전이 돼서야 그 동네를 조금씩 벗어나서 지금 여기저기 살고 있을 따름이다. 그 시절 그 동네의 환경이 정확히 어떠했는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 열대의 건조한 '어떤 환경' 에서 살아 남기 위해 적응한 결과로 지금 인간의 모든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특징이 형성되었을 터다. 그렇게 우리 종을 만든 그 '어떤 환경'에 '인간은 본디 어떻게 사는 존재인지'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줄곧 생각하고 있다. 그 '어떤 환경'은 굉장히 복합적일 것이고, 그에 대한 연구는 나의 몫이 아니겠지만 아무튼 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게 최적화된 삶의 양식이라는게 있긴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진화는 목적성이 없기에 그저 눈앞에 닥친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각각의 개체 입장에서는 우리 종의 원대한 본질 같은건 모르고 있는 것이 당연하고, 그 본질은 어쩌면 하나의 '해답' 같은 형태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각각의 개체의 심리와 행동을 사소하게 움직이고 있는, 미시적인 '동기'가 모든 인간 개체에게 일관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동기'가 가이드처럼 각각의 개체들을 종 차원의 '최적화된 삶의 양식'을 지향하게끔 유도한다고는 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일관적으로 작용하는 그 '동기'를 이해하면, 내가 호모사피엔스로서 어떻게 사는게 잘 사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동기'는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개일 수도 있다. 고정된 가치일 수도 있고, 그 때 그 때 변화하는 가치일 수도 있다. 이제 막 서른이라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행복'이 그 동기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행복이 커지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며, 또 불행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은 분명하니까.

 

 

2. 인생의 행복

누가 인생의 목표를 물어보면 '내 이름이 새겨진 피라미드를 세우는 것' 이라고 답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면 재밌을 것 같긴 하다) 반쯤 우스개였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피라미드는 이미 인간이 만든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인데, 어떤 미래 다큐에 따르면 가장 나중까지 남아 있을 인공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피라미드는 내가 아는 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 중 가장 불변에 가까운 것이라서, 내 인생에서 뭔가 결과물이 나왔는데 그게 피라미드 정도로 불변인 것이라면 최고로 완성도 있는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내 사후에 몇만년간 나의 이름을 알려줄 피라미드 같은건 내 인생에서 내가 느끼는 행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행복 극대화의 관점에서 인생에 완성이란게 있다면 아마 '더이상 어떠한 번민과 고통도 없는, 일정한 행복이 무한히 이어지는 상태' 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삶에서 그런 결말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필요한 모든걸 가질 능력을 갖추더라도, 대부분 인간의 인생은 오롯히 혼자만 존재하는 인생이 아니다. 나의 육체와 마음도 늙어가며 언제든 병들고 해질수 있고, 내 행복과 연관된 수많은 사람들 또한 끊임없이 숨쉬고 먹어야 하며 아프거나 늙어서 죽을 것이다. 내 주변의 땅과 공기와 물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바뀔 것이다. 이 모든 변동은 결국 내 삶에 끊임없이 흘러들고, 나는 변동에 대응해 생존하고 행복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투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면 인생에는 애초에 '잘 살다보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완성된 분명한 결과물'은 없는 것 같다. 인생의 각 단계가 완료되는 부분적인 지점은 수없이 많겠지만, 인생이 완료되는 지점은 사망 외엔 없다. 즉, 인생은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하나의 완성된 결과를 도출해내는 여정이 아니다. 언젠가 도달할 인생의 완성만을 바라며, 하루하루의 삶은 그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간 과정으로만 여긴다면, (죽는날을 예약해서 맞춰 죽는게 아닌 이상) 평생 중간과정만을 살다 가게된다.

 

그보다는, 운 좋으면 하루에도 몇번씩은 느낄 수 있는 하나하나의 행복감들을 전부 '그 시점에 인생의 결실' 이라고 여기고 만끽하며 사는 삶이 좀 더 잘 사는 삶이지 않을까. 어느 순간 내가 행복하다면 '나는 지금 행복하니 일단 지금은 잘 살고 있다' 고 생각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3. 코리안 밀레니얼의 인생

어렸을 적 나는 내가 용기와 의지만 있다면 지구상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맘편히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지금은 용기랑 의지가 부족하고 당장에 한국이 편해서 여기서 살지만, 내 이해관계에 더 잘 맞는 다른 나라가 있다면 그냥 거기서 사는데 아무 무리가 없는, 자유롭고 중립적인 지구촌 시민인줄 알았다. 그렇게 한 국가에 치우치지 않은 가치를 가지고 전세계를 무대로 살아야 더 큰 기회를 잡고 더 영향력이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잠깐 살았을 때 깨달은바 수십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한국인으로 살아온 나의 몸과 마음이 제일 편한 환경은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는 것이며, 이미 한국에 터잡은 이상 다른 곳에서는 죽을 때까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원주민들보다 조금 더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기본적으로 내 터는 한국에 잡고 한국 원주민으로 사는게 제일 편하게 살다 갈 수 있는 방법이고, 해외에 일이 있더라도 한국을 기반으로 자유로이 왕래하는 정도로만 사는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근데 한국의 시장 상황이 내가 죽는날까지 돈벌어먹고 살기에 문제가 없을까? 

 

한국은 인구 약 5200만명 수준으로 나름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국가다. 비슷한 나라를 찾아 객관적인 감을 잡아보자면 인구규모, GDP 모두 대충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중간정도 되는 나라쯤 된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시장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지금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며 올해 혹은 내년부터 인구가 자연감소한다고 한다. 경제성장률도 2% 아래로 둔화되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은 여러모로 단군 이래 지금이 정점이다. 앞으로는 정체와 감소만이 남았다. 한국 시장이 세계적으로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도 2020년대 중반정도가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지금 한국의 출산율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저출산이다. 당장은 어린애들이 좀 안보이는 정도의 문제겠지만 지금의 저출산이 10년, 20년 후부터는 한국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그로 인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쇠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시기에 높은 확률로 한국에 살고 있을 나에게도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출산율이 이렇게까지 낮은건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더이상 인구를 늘리지 않게끔 설계된 결과인 것 같다. 현재 한국은 도시국가를 제외한 전세계 모든 국가 중 3번째로 인구밀도가 높다. 땅 자체에서 솟아나는 자원도 없다. 경제적, 사회적 문제가 원인이라는 말도 맞긴 하지만 그 사회, 경제적인 문제 자체가 애초에 이 땅이 현재의 경제수준을 가진 인구를 더 많이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도 생각한다. 한국인이 개체수 조절을 위해 투신자살하는 레밍처럼 (이건 비유적 표현이며 실제론 레밍의 자살 원인이 인구조절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 어쩔수 없이 주어진 한국이라는 자연/사회적 구조 안에서 스스로 개체수를 조절하고 있는 과정일 수도 있다. 어떤 정책도 근본적으로 인구를 더 이상 늘릴 수는 없으며 몇십년에 걸쳐 서서히 개체수가 줄어들면 알아서 다시 출산율이 증가할 수도 있다. 

 

이것이 92년생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 경제, 한국 시장에 대한 인식이다. 상황이 이런데 한국에서 내수시장에 좌우되는 직종을 가진다면 과연 죽는날까지 적절한 삶의 질을 유지할 경제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마 커리어 상 어느 순간에는 수익의 일정 부분 혹은 대부분을 해외 시장에서 창출하는 직종으로의 도약이 필요할 것이다. 근데 상술했듯 나는 결국에는 한국에서 사는게 제일 편할 것이라는 의견이기에 도약하더라도 한국에서 가정꾸리고 일하고 살면서 돈만 외국인 지갑에서 뽑아먹고 싶다. (ㅋㅋ)

 

근데 또 내 또래 인구를 생각해보면, 은근히 내가 경제활동인구일때 까지는 한국시장이 괜찮을 수도 있다. 한국의 1992년 출생아수는 73.1만명이다. 1984년생~2020년생 중에서 92년생이 제일 많다. 내 또래가 중년이되면 아마 그들이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집단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세대의 일원으로서 내 또래한테 잘먹힐 장사만 해도 죽을때까지 어느정도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진짜 일말의 희망도 없이 한국 안에서 미래가 없는건 요즘 태어나는 애기들인 것 같다. 2020년 출생아수가 20만명 대이고, 아마 2020년대 초반 몇년간 계속 이 수준일 것이다. 92년생의 1/3 수준이다. 그들이 이 사회에서 주류가 될 기회가 있을까?  2020년생이 서른살이 되어 사회에 나가면, 사회에서 그들보다 머릿수가 3배는 많은 58살의 92년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할 것이다.

 

나중에 내가 어찌저찌 잘 먹고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으로서 지구상의 젊은 한국인이 점점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은 참 씁쓸할 것 같다.

 

 

꼬리말. 개

목적 없이 쓴 글이라 마무리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결론은 건너뛰었고 그냥 본문에 넣기엔 애매한 잡다한 생각 중 하나로 꼬리말을 갈음한다.

Canis lupus familiaris

나는 개라는 동물에 대한 편협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개는 사실 늑대다. 늑대와 가까운 동물 정도가 아니라 유전적으로 그냥 늑대다. 치와와는 작은 늑대고 닥스훈트는 긴 늑대고 사모예드는 흰털늑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개랑 늑대가 같은 취급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들판에서 알아서 잘 살고 있는 늑대를 사람의 가족이라고 생각 안하듯이 개랑도 인간과 동물이 으레 가지는 정도의 거리를 둬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몇몇 개들과의 교류, 그리고 여러 자료를 통해 알아 보니 인간의 문명과 개는 공진화를 했던 것 같다. 개는 인간이 가장 먼저 가축화한 동물로 추정된다. 그만큼 인류의 완전 초창기부터,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등등 문명이 발전하는 모든 과정에 개도 참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개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인간 사회의 모습이 일부라도 지금과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개를 아직 늑대와 종분화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인간과 한데 묶여 공진화 중인 특수한 존재로 여기려고 하고 있다.